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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I am the Seouler</title>
    <link>https://www.iamtheseouler.com/</link>
    <description>있는 곳을 산다. 지나온 곳을 여행이라 부른다. 서울러처럼.</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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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여행지</title>
      <link>https://www.iamtheseouler.com/ko/jinsang</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ww.iamtheseouler.com/ko/jinsang</guid>
      <pubDate>Sat, 29 Aug 2026 00:00:00 GMT</pubDate>
      <description><![CDATA[<p>나는 서울을 여행지처럼 여기며 살기로 했다. 그 뒤로 이 도시에서 걷는 길이 달라졌다. 안 보이던 것이 보였고 지나치던 자리에 멈춰 서게 됐다. 그런데 이번 여름 바닷가 돗자리에 앉아서 알았다. 내가 목록에 넣은 적 없는 곳이 하나 있었다.</p>
<h3>1. 진상</h3>
<p>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지랑마을.</p>
<p>우리 가족은 이곳을 마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 그냥 진상이라고 했다. 진상에 간다. 진상에 있다. 진상에서 온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1.jpg" alt="대나무가 우거진 좁은 길 끝의 대문"></figure><p>엄마가 나고 자란 곳이다.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던 집.</p>
<p>여름이 되면 우리는 그 집에 모였다. 방학이 있었고 8월에는 할아버지 생신이 있었다. 두 가지가 같은 계절에 있었으니 우리집 여름휴가는 늘 진상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학창시절까지 매년 그랬다.</p>
<p>그리고 이 집에는 내 기억보다 앞선 시간이 있다. 더 어릴 적에 나는 한동안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없다. 없는 걸 보면 아주 어릴 때였을 것이다.</p>
<p>그러니까 이곳은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이고 가장 여러 번 간 곳이다.</p>
<h3>2. 그 집</h3>
<p>할아버지는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고 한다. 내가 직접 가진 것은 표정 하나다. 인자하다는 말을 나는 그 얼굴로 배웠다.</p>
<p>그리고 사탕. 할아버지는 맛있는 사탕이나 간식을 어딘가에 숨겨두셨다가 몰래 쥐여주시곤 했다. 무엇을 받았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맛이 아니라 손이다.</p>
<p>할머니는 음식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콩국을 두 가지로 먹었다. 하나는 따뜻한 것. 손으로 썬 면을 콩국에 넣고 함께 끓여 마지막에 설탕으로 맛을 냈다. 다른 하나는 우뭇가사리를 넣어 차게 먹는 것.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손맛이었다.</p>
<p>할아버지가 먼저 가셨다. 내가 10대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스무 살 넘었을 무렵 가셨다.</p>
<p>이제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은 따뜻한 온기들. 그립다.</p>
<p>그 뒤로 진상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갈 이유가 줄었으니까.</p>
<p>그런데 그 집은 비지 않았다. 엄마의 형제들이 계속 그 집을 가꿨다. 낡은 데를 손보고 쓰기 편하게 고쳐두기도 했다. 내 발길이 뜸해진 동안에도 누군가는 계속 그 마당을 밟고 있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2.jpg" alt="사람 없는 마당에 늘어진 호스와 물뿌리개, 그 너머 논과 산"></figure><p>그리고 은퇴한 아빠가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아빠는 서울 사람이다. 평생 서울에서 사실 줄 알았는데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셨다. 감사하게도 형제들은 그런 아빠에게 제일 좋은 독채 방을 내어주셨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3.jpg" alt="밭에서 김을 매는 사람의 뒷모습, 뒤로 마을"></figure><p>그래서 나는 다시 진상에 자주 가게 되었다.</p>
<h3>3. 황금알마트</h3>
<p>이번 여름에도 우리는 진상에 갔다. 아이들 방학이었다.</p>
<p>언니네도 왔다. 조카가 셋이니 마당에 아이가 다섯이었다.</p>
<p>나는 8살 터울 남매를 키운다. 그래서 외동 둘을 키운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런데 이 마당에서만은 그 말이 틀린다.</p>
<p>아이들은 마당에서 논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받아 첨벙거리고 텃밭에 들어가 흙을 만진다. 개구리를 본다. 서울에서는 볼 일이 없는 것이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4.jpg" alt="마당의 물놀이 대야와 아이들"></figure><p>내가 어릴 적 이 마당에서 놀던 방식과 비슷하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5.jpg" alt="청개구리를 쥐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figure><p>그리고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따로 있다.</p>
<p>집에서 걸어서 십 분. 황금알마트라는 가게가 있다. 아이들은 거기까지 걸어가서 각자 좋아하는 간식을 하나씩 고른다. 그리고 그걸 먹으면서 걸어 돌아온다. 그 길을 좋아한다.</p>
<p>아이들에게 이곳은 여행지다. 물놀이가 있고 처음 보는 것들이 있고 하루에 한 번 가게에 간다. 서울에서는 이런 여름이 없다.</p>
<p>내가 어릴 적에도 비슷한 자리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불량식품을 사 먹었다.</p>
<p>같은 가게는 아니다. 같은 아이도 아니다. 그런데 걸어서 십 분이라는 거리는 그대로고 돌아오는 길에 먹는다는 것도 그대로다.</p>
<h3>4. 돗자리</h3>
<p>하루는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바다에 갔다.</p>
<p>아이들은 전부 물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짐을 지키며 돗자리에 앉아 있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6.jpg" alt="소나무 그늘에 펼쳐진 돗자리와 그 너머의 바다"></figure><p>그러다 문득 이상했다. 어릴 적 이 여름에서 나는 물에 들어가 있는 쪽이었다. 어른들이 돗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어른들이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다. 이제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p>
<p>같은 여름인데 자리가 바뀌었다.</p>
<p>돗자리에 앉아 나는 내가 다녀온 곳들을 떠올렸다. 처음 혼자 내렸던 낯선 도시. 두 번씩 갔던 곳들. 언젠가 다시 가려고 담아둔 곳들.</p>
<p>그중에 진상은 없었다.</p>
<p>평생 매년 갔는데도 그랬다. 외갓집이니까.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이니까. 나는 그 일에 여행이라는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p>
<p>몰랐던 게 아니다. 이어보지 않은 것이다.</p>
<p>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여행이었다. 나에게는 오래 아니었다.</p>
<p>서울로 돌아왔다. 이 도시를 여행지처럼 여기며 살기로 한 것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전부터 이미 여행이었던 곳이 하나 있었다.</p>
<p>그래서 한 곳을 더 적었다.</p>
<p>내가 가장 오래 다닌 곳. 여행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곳. 진상.</p>
<p>여름이 오면 또 진상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서울을 걸을 것이다.</p>
<p>둘 다 여행이다.</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나는 서울을 여행지처럼 여기며 살기로 했다. 그 뒤로 이 도시에서 걷는 길이 달라졌다. 안 보이던 것이 보였고 지나치던 자리에 멈춰 서게 됐다. 그런데 이번 여름 바닷가 돗자리에 앉아서 알았다. 내가 목록에 넣은 적 없는 곳이 하나 있었다.</p>
<h3>1. 진상</h3>
<p>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지랑마을.</p>
<p>우리 가족은 이곳을 마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 그냥 진상이라고 했다. 진상에 간다. 진상에 있다. 진상에서 온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1.jpg" alt="대나무가 우거진 좁은 길 끝의 대문"></figure><p>엄마가 나고 자란 곳이다.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던 집.</p>
<p>여름이 되면 우리는 그 집에 모였다. 방학이 있었고 8월에는 할아버지 생신이 있었다. 두 가지가 같은 계절에 있었으니 우리집 여름휴가는 늘 진상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학창시절까지 매년 그랬다.</p>
<p>그리고 이 집에는 내 기억보다 앞선 시간이 있다. 더 어릴 적에 나는 한동안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없다. 없는 걸 보면 아주 어릴 때였을 것이다.</p>
<p>그러니까 이곳은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이고 가장 여러 번 간 곳이다.</p>
<h3>2. 그 집</h3>
<p>할아버지는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고 한다. 내가 직접 가진 것은 표정 하나다. 인자하다는 말을 나는 그 얼굴로 배웠다.</p>
<p>그리고 사탕. 할아버지는 맛있는 사탕이나 간식을 어딘가에 숨겨두셨다가 몰래 쥐여주시곤 했다. 무엇을 받았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맛이 아니라 손이다.</p>
<p>할머니는 음식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콩국을 두 가지로 먹었다. 하나는 따뜻한 것. 손으로 썬 면을 콩국에 넣고 함께 끓여 마지막에 설탕으로 맛을 냈다. 다른 하나는 우뭇가사리를 넣어 차게 먹는 것.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손맛이었다.</p>
<p>할아버지가 먼저 가셨다. 내가 10대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스무 살 넘었을 무렵 가셨다.</p>
<p>이제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은 따뜻한 온기들. 그립다.</p>
<p>그 뒤로 진상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갈 이유가 줄었으니까.</p>
<p>그런데 그 집은 비지 않았다. 엄마의 형제들이 계속 그 집을 가꿨다. 낡은 데를 손보고 쓰기 편하게 고쳐두기도 했다. 내 발길이 뜸해진 동안에도 누군가는 계속 그 마당을 밟고 있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2.jpg" alt="사람 없는 마당에 늘어진 호스와 물뿌리개, 그 너머 논과 산"></figure><p>그리고 은퇴한 아빠가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아빠는 서울 사람이다. 평생 서울에서 사실 줄 알았는데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셨다. 감사하게도 형제들은 그런 아빠에게 제일 좋은 독채 방을 내어주셨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3.jpg" alt="밭에서 김을 매는 사람의 뒷모습, 뒤로 마을"></figure><p>그래서 나는 다시 진상에 자주 가게 되었다.</p>
<h3>3. 황금알마트</h3>
<p>이번 여름에도 우리는 진상에 갔다. 아이들 방학이었다.</p>
<p>언니네도 왔다. 조카가 셋이니 마당에 아이가 다섯이었다.</p>
<p>나는 8살 터울 남매를 키운다. 그래서 외동 둘을 키운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런데 이 마당에서만은 그 말이 틀린다.</p>
<p>아이들은 마당에서 논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받아 첨벙거리고 텃밭에 들어가 흙을 만진다. 개구리를 본다. 서울에서는 볼 일이 없는 것이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4.jpg" alt="마당의 물놀이 대야와 아이들"></figure><p>내가 어릴 적 이 마당에서 놀던 방식과 비슷하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5.jpg" alt="청개구리를 쥐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figure><p>그리고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따로 있다.</p>
<p>집에서 걸어서 십 분. 황금알마트라는 가게가 있다. 아이들은 거기까지 걸어가서 각자 좋아하는 간식을 하나씩 고른다. 그리고 그걸 먹으면서 걸어 돌아온다. 그 길을 좋아한다.</p>
<p>아이들에게 이곳은 여행지다. 물놀이가 있고 처음 보는 것들이 있고 하루에 한 번 가게에 간다. 서울에서는 이런 여름이 없다.</p>
<p>내가 어릴 적에도 비슷한 자리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불량식품을 사 먹었다.</p>
<p>같은 가게는 아니다. 같은 아이도 아니다. 그런데 걸어서 십 분이라는 거리는 그대로고 돌아오는 길에 먹는다는 것도 그대로다.</p>
<h3>4. 돗자리</h3>
<p>하루는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바다에 갔다.</p>
<p>아이들은 전부 물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짐을 지키며 돗자리에 앉아 있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insang-06.jpg" alt="소나무 그늘에 펼쳐진 돗자리와 그 너머의 바다"></figure><p>그러다 문득 이상했다. 어릴 적 이 여름에서 나는 물에 들어가 있는 쪽이었다. 어른들이 돗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어른들이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다. 이제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p>
<p>같은 여름인데 자리가 바뀌었다.</p>
<p>돗자리에 앉아 나는 내가 다녀온 곳들을 떠올렸다. 처음 혼자 내렸던 낯선 도시. 두 번씩 갔던 곳들. 언젠가 다시 가려고 담아둔 곳들.</p>
<p>그중에 진상은 없었다.</p>
<p>평생 매년 갔는데도 그랬다. 외갓집이니까.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이니까. 나는 그 일에 여행이라는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p>
<p>몰랐던 게 아니다. 이어보지 않은 것이다.</p>
<p>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여행이었다. 나에게는 오래 아니었다.</p>
<p>서울로 돌아왔다. 이 도시를 여행지처럼 여기며 살기로 한 것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전부터 이미 여행이었던 곳이 하나 있었다.</p>
<p>그래서 한 곳을 더 적었다.</p>
<p>내가 가장 오래 다닌 곳. 여행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곳. 진상.</p>
<p>여름이 오면 또 진상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서울을 걸을 것이다.</p>
<p>둘 다 여행이다.</p>
]]></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딸이 영어를 배우는 두 시간, 나는 백 년을 걸었다</title>
      <link>https://www.iamtheseouler.com/ko/jeongdong</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ww.iamtheseouler.com/ko/jeongdong</guid>
      <pubDate>Mon, 10 Aug 2026 00:00:00 GMT</pubDate>
      <description><![CDATA[<p>이 글은 기다리다가 시작됐다. 아이를 학원에 들여보내고 남은 두 시간. 그 시간에 나는 그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내가 서 있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p>
<h3>1. 세 시의 버스</h3>
<p>2주 동안 우리는 매일 세 시에 유치원을 나온다. 영국문화원 네 시 이십 분 수업에 맞추려면 그래야 한다.</p>
<p>한낮의 열기가 가득 고여 있는 시간. 아이 손을 잡고 정류장에 선다. 시청 쪽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면 아이는 창밖을 보고 나는 자꾸 시계를 본다. 늦으면 안 되니까.</p>
<p>솔직히 말하면 번거로운 일이다. 아이를 일찍 데리고 나와 도심까지 들어와서 두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일. 그것도 무더위가 한창인 이 여름날에.</p>
<p>그래도 나는 좋은 점을 세어봤다. 아이에겐 영어를 배우는 두 시간. 나에겐 온전히 비어 있는 두 시간.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 우리 둘에게 남는 시간.</p>
<p>이 2주는 원래 영어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덤이 하나 더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지 않는 것. 이왕 나온 김에 아이와 저녁을 먹고 이 동네를 조금씩 둘러보다 돌아가는 것. 짐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을 나는 슬쩍 덤으로 옮겨 적었다. 내가 사는 도시를 낯선 눈으로 들여다보는 일. 나는 그렇게 살기로 했으니까.</p>
<p>여섯 시 이십 분까지. 유리문이 닫히고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지면 나는 그 두 시간을 손에 든 채 거리에 남겨진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1-corridor.jpg" alt="영국문화원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아이"></figure><p>그리고 걸었다. 나는 이 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전에도 다른 이유로 여러 번 걸어본 거리였으니까. 새로울 게 없다고 여겼다. 궁 담장을 한 바퀴 돌고 어디 앉아 커피나 한 잔 하면 두 시간쯤은 가겠거니 했다.</p>
<h3>2. 백사십 년 전의 영어</h3>
<p>아이가 영어를 배우러 들어간 건물이 어느 자리 위에 세워진 것인지 나는 가보고서야 알았다. 배재학당 터였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2-brick.jpg" alt="파란 유리 건물과 나란히 선 붉은 벽돌 동관"></figure><p>바로 옆에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서 있다. 백 년 전 배재학당의 교실이었고 지금은 역사박물관이다. 그 앞에 한 사람의 동상이 있다. 아펜젤러.</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3-statue.jpg" alt="아펜젤러 동상"></figure><p>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웠고 시험에도 나왔다. 아펜젤러 — 배재학당 — 근대 교육. 그렇게 세 칸으로 묶어 외웠다가 오래전에 흐려진 이름.</p>
<p>나는 그 앞에 서서 안내판을 읽었다. 교과서 속에 납작하게 눌려 있던 이름이 그제야 두께를 얻었다.</p>
<p>1885년 8월. 미국에서 온 스물일곱의 젊은 선교사가 조선 청년 둘을 앉혀놓고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 고종은 그 학당에 이름을 내렸다. 배재(培材) — 인재를 기른다는 뜻. 우리나라 근대 교육이 여기서 시작되었다.</p>
<p>그러니까 백사십 년 전에도 이 언덕에서 누군가는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내 딸이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언어를. 아마 나보다 훨씬 절박하게.</p>
<p>나는 아이를 데리고 아주 현대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오래된 줄에 서 있었던 것이다.</p>
<h3>3. 나의 선배</h3>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4-plaque.jpg" alt="아펜젤러 안내판"></figure><p>안내판에는 그의 마지막도 적혀 있었다.</p>
<p>1902년 6월. 성서 번역 회의에 가려고 제물포에서 목포로 향하던 밤배가 짙은 안개 속에서 다른 배와 부딪쳤다. 배는 2분 만에 가라앉았고 그는 빠져나왔다. 그런데 함께 타고 있던 조선인 청년과 여학생을 데리러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p>
<p>돌아오지 못했다. 마흔넷이었다.</p>
<p>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히 먹먹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를 멈춰 세운 건 그 한 줄 안에 박혀 있던 단어 하나였다.</p>
<p>그 여학생은 정신여학교 학생이었다.<br>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내가 나온 학교다.</p>
<p>백이십 년 전에 죽은 미국인과 나 사이에 아무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내 학교 선배를 구하려고 가라앉는 배로 돌아갔다. 이름도 모르는 그 여학생은 나보다 백 년쯤 앞서 같은 교문을 드나든 사람이었다.</p>
<p>역사가 갑자기 남의 일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겐 그게 안내판 앞이었다.</p>
<p>낯선 나라였을 것이다. 그는 스물일곱에 건너와 마흔넷에 이 나라 앞바다에서 죽었다.</p>
<p>그에게 배우겠다고 모여든 청년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 이 언덕에서 영어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언어였다.</p>
<p>그 앞에서 나는 조금 작아졌다.</p>
<p>내 아이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니까. 넓은 세상을 보고 어디서든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 지극히 사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이유다.</p>
<p>그곳을 빠져나와 걷는 내내 그 생각이 나를 따라왔다.</p>
<h3>4. 걸어서 오 분</h3>
<p>걸어서 오 분이라고 했다.</p>
<p>안내판 앞에서 생긴 관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나는 이 동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명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이었다.</p>
<p>몰랐다. 정동길은 몇 번이나 걸었는데 그런 건물이 있는 줄도 몰랐다.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고 정동극장 옆 좁은 길로 들어가야 나온다니 우연히는 만날 수 없는 자리였다.</p>
<p>거리가 달라진 게 아니라 내 관심이 달라진 것이었다.</p>
<p>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나는 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p>
<p>골목이 끝나는 자리에 붉은 벽돌집이 서 있었다. 그 앞에 서는 순간 시간이 백 년쯤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5-jungmyeongjeon.jpg" alt="중명전 정면"></figure><p>아름다웠다. 오래 견딘 것들에게만 생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한참을 올려다보다 안으로 들어갔다.</p>
<p>이 집은 고종의 서재였다. 책과 보물을 두고 외국 사절을 맞던 방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밤 이 건물은 일본군에게 둘러싸였고 그 안에서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p>
<p>외교권. 세계와 직접 말을 섞을 권리.</p>
<p>그 아름다움 안에서 나라가 말을 잃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6-treaty.jpg" alt="을사늑약 체결 장면 재현"></figure><p>그 장면을 재현한 곳에서 나는 분노했다. 누군가는 도우러 왔고 다른 누군가는 뺏으러 왔다.</p>
<p>세계가 밀려들어 오던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단단한 나라였다면 어땠을까.</p>
<p>배우려는 마음은 그때도 여기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을 지켜줄 힘이 없었을 뿐이다.</p>
<h3>5. 여섯 시 이십 분</h3>
<p>여섯 시 이십 분. 유리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온다.</p>
<p>오늘은 어땠어. 재미있었어?</p>
<p>예스. 아이는 환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 엄지를 척 들어 보인다. 재미있었어. 또 오고 싶어. 수업이 끝나는 게 아쉬운 모양이다.</p>
<p>이곳을 좋아하니 다행이다. 세 시에 유치원을 나서던 그 번거로움이 이 얼굴 하나로 갚아진다.</p>
<p>아이 손을 잡는다. 내가 방금 어디에 다녀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p>
<p>우리는 곧장 버스를 타지 않는다.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7-courtyard.jpg" alt="옛 교사 앞마당을 걸어가는 아이"></figure><p>정동길에는 오래된 가게가 많다. 혼자 걷던 낮에 몇 번이나 눈여겨봤다.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자리를 지킨 집들. 언젠가 저기 앉아 한 그릇 먹어보고 싶었다.</p>
<p>그런데 아이와 둘이서는 들어가기가 어렵다. 매운 것이 많아 아이가 먹을 수 없고 둘이 들어가 하나만 시키기도 마땅치 않다. 무엇보다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가 한 숟가락 뜨고 안 먹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난감해진다.</p>
<p>그래서 우리가 먹는 건 김밥이나 토스트나 국수다.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것들. 아쉬움은 접어두고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쪽을 고른다.</p>
<p>백 년쯤 된 거리에서 우리는 김밥을 먹었다.</p>
<p>이 거리의 오래된 것들은 박물관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냥 서 있고 그냥 영업 중이다.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고 문을 열고 들어가고 한 그릇을 비우고 나온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p>
<p>대단할 것 없는 저녁이었다.</p>
<h3>6. 같은 거리</h3>
<p>저녁을 먹고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궁 담장을 따라 걷다가 시청 앞 광장을 지났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8-wall.jpg" alt="덕수궁 돌담길에 선 아이"></figure><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9-plaza.jpg" alt="서울광장을 걸어가는 아이. 뒤로 옛 시청과 새 시청"></figure><p>광장에는 외국인이 많다. 캐리어를 끌고 지도를 확인하고 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p>
<p>우리 동네에도 외국인이 많다. 오래전부터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살았고 요즘은 여행 온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서울은 어느새 세계가 오는 도시가 되었다.</p>
<p>백이십 년 전에도 이 거리에는 외국인이 많았다. 다만 그들이 여기 온 이유는 지금과 달랐다.</p>
<p>버스에 오르면 아이는 금세 잠이 든다. 나는 그 얼굴을 본다. 조금 전 유리문을 열고 나오며 엄지를 척 들던 얼굴을.</p>
<p>며칠 동안 나를 따라오던 생각의 답이 그 얼굴에 있었다. 내 아이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사소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사소해질 수 있게 된 것. 그게 그들이 원했던 결과였다.</p>
<p>백이십 년 전 이 거리에서 누군가가 끝내 지키지 못한 권리를 내 아이는 그냥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 말을 웃으면서 쓴다. 예스.</p>
<p>누군가는 이 거리를 보려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 나는 아이 학원 때문에 왔다. 같은 거리다.</p>
<p>비행기를 타야만 백 년을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p>
<p>나는 매일 여행한다. 일상을 여행자처럼 산다. 바로 이곳 서울에서.</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이 글은 기다리다가 시작됐다. 아이를 학원에 들여보내고 남은 두 시간. 그 시간에 나는 그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내가 서 있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p>
<h3>1. 세 시의 버스</h3>
<p>2주 동안 우리는 매일 세 시에 유치원을 나온다. 영국문화원 네 시 이십 분 수업에 맞추려면 그래야 한다.</p>
<p>한낮의 열기가 가득 고여 있는 시간. 아이 손을 잡고 정류장에 선다. 시청 쪽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면 아이는 창밖을 보고 나는 자꾸 시계를 본다. 늦으면 안 되니까.</p>
<p>솔직히 말하면 번거로운 일이다. 아이를 일찍 데리고 나와 도심까지 들어와서 두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일. 그것도 무더위가 한창인 이 여름날에.</p>
<p>그래도 나는 좋은 점을 세어봤다. 아이에겐 영어를 배우는 두 시간. 나에겐 온전히 비어 있는 두 시간.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 우리 둘에게 남는 시간.</p>
<p>이 2주는 원래 영어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덤이 하나 더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지 않는 것. 이왕 나온 김에 아이와 저녁을 먹고 이 동네를 조금씩 둘러보다 돌아가는 것. 짐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을 나는 슬쩍 덤으로 옮겨 적었다. 내가 사는 도시를 낯선 눈으로 들여다보는 일. 나는 그렇게 살기로 했으니까.</p>
<p>여섯 시 이십 분까지. 유리문이 닫히고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지면 나는 그 두 시간을 손에 든 채 거리에 남겨진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1-corridor.jpg" alt="영국문화원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아이"></figure><p>그리고 걸었다. 나는 이 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전에도 다른 이유로 여러 번 걸어본 거리였으니까. 새로울 게 없다고 여겼다. 궁 담장을 한 바퀴 돌고 어디 앉아 커피나 한 잔 하면 두 시간쯤은 가겠거니 했다.</p>
<h3>2. 백사십 년 전의 영어</h3>
<p>아이가 영어를 배우러 들어간 건물이 어느 자리 위에 세워진 것인지 나는 가보고서야 알았다. 배재학당 터였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2-brick.jpg" alt="파란 유리 건물과 나란히 선 붉은 벽돌 동관"></figure><p>바로 옆에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서 있다. 백 년 전 배재학당의 교실이었고 지금은 역사박물관이다. 그 앞에 한 사람의 동상이 있다. 아펜젤러.</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3-statue.jpg" alt="아펜젤러 동상"></figure><p>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웠고 시험에도 나왔다. 아펜젤러 — 배재학당 — 근대 교육. 그렇게 세 칸으로 묶어 외웠다가 오래전에 흐려진 이름.</p>
<p>나는 그 앞에 서서 안내판을 읽었다. 교과서 속에 납작하게 눌려 있던 이름이 그제야 두께를 얻었다.</p>
<p>1885년 8월. 미국에서 온 스물일곱의 젊은 선교사가 조선 청년 둘을 앉혀놓고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 고종은 그 학당에 이름을 내렸다. 배재(培材) — 인재를 기른다는 뜻. 우리나라 근대 교육이 여기서 시작되었다.</p>
<p>그러니까 백사십 년 전에도 이 언덕에서 누군가는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내 딸이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언어를. 아마 나보다 훨씬 절박하게.</p>
<p>나는 아이를 데리고 아주 현대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오래된 줄에 서 있었던 것이다.</p>
<h3>3. 나의 선배</h3>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4-plaque.jpg" alt="아펜젤러 안내판"></figure><p>안내판에는 그의 마지막도 적혀 있었다.</p>
<p>1902년 6월. 성서 번역 회의에 가려고 제물포에서 목포로 향하던 밤배가 짙은 안개 속에서 다른 배와 부딪쳤다. 배는 2분 만에 가라앉았고 그는 빠져나왔다. 그런데 함께 타고 있던 조선인 청년과 여학생을 데리러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p>
<p>돌아오지 못했다. 마흔넷이었다.</p>
<p>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히 먹먹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를 멈춰 세운 건 그 한 줄 안에 박혀 있던 단어 하나였다.</p>
<p>그 여학생은 정신여학교 학생이었다.<br>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내가 나온 학교다.</p>
<p>백이십 년 전에 죽은 미국인과 나 사이에 아무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내 학교 선배를 구하려고 가라앉는 배로 돌아갔다. 이름도 모르는 그 여학생은 나보다 백 년쯤 앞서 같은 교문을 드나든 사람이었다.</p>
<p>역사가 갑자기 남의 일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겐 그게 안내판 앞이었다.</p>
<p>낯선 나라였을 것이다. 그는 스물일곱에 건너와 마흔넷에 이 나라 앞바다에서 죽었다.</p>
<p>그에게 배우겠다고 모여든 청년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 이 언덕에서 영어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언어였다.</p>
<p>그 앞에서 나는 조금 작아졌다.</p>
<p>내 아이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니까. 넓은 세상을 보고 어디서든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 지극히 사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이유다.</p>
<p>그곳을 빠져나와 걷는 내내 그 생각이 나를 따라왔다.</p>
<h3>4. 걸어서 오 분</h3>
<p>걸어서 오 분이라고 했다.</p>
<p>안내판 앞에서 생긴 관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나는 이 동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명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이었다.</p>
<p>몰랐다. 정동길은 몇 번이나 걸었는데 그런 건물이 있는 줄도 몰랐다.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고 정동극장 옆 좁은 길로 들어가야 나온다니 우연히는 만날 수 없는 자리였다.</p>
<p>거리가 달라진 게 아니라 내 관심이 달라진 것이었다.</p>
<p>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나는 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p>
<p>골목이 끝나는 자리에 붉은 벽돌집이 서 있었다. 그 앞에 서는 순간 시간이 백 년쯤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5-jungmyeongjeon.jpg" alt="중명전 정면"></figure><p>아름다웠다. 오래 견딘 것들에게만 생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한참을 올려다보다 안으로 들어갔다.</p>
<p>이 집은 고종의 서재였다. 책과 보물을 두고 외국 사절을 맞던 방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밤 이 건물은 일본군에게 둘러싸였고 그 안에서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p>
<p>외교권. 세계와 직접 말을 섞을 권리.</p>
<p>그 아름다움 안에서 나라가 말을 잃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6-treaty.jpg" alt="을사늑약 체결 장면 재현"></figure><p>그 장면을 재현한 곳에서 나는 분노했다. 누군가는 도우러 왔고 다른 누군가는 뺏으러 왔다.</p>
<p>세계가 밀려들어 오던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단단한 나라였다면 어땠을까.</p>
<p>배우려는 마음은 그때도 여기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을 지켜줄 힘이 없었을 뿐이다.</p>
<h3>5. 여섯 시 이십 분</h3>
<p>여섯 시 이십 분. 유리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온다.</p>
<p>오늘은 어땠어. 재미있었어?</p>
<p>예스. 아이는 환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 엄지를 척 들어 보인다. 재미있었어. 또 오고 싶어. 수업이 끝나는 게 아쉬운 모양이다.</p>
<p>이곳을 좋아하니 다행이다. 세 시에 유치원을 나서던 그 번거로움이 이 얼굴 하나로 갚아진다.</p>
<p>아이 손을 잡는다. 내가 방금 어디에 다녀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p>
<p>우리는 곧장 버스를 타지 않는다.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7-courtyard.jpg" alt="옛 교사 앞마당을 걸어가는 아이"></figure><p>정동길에는 오래된 가게가 많다. 혼자 걷던 낮에 몇 번이나 눈여겨봤다.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자리를 지킨 집들. 언젠가 저기 앉아 한 그릇 먹어보고 싶었다.</p>
<p>그런데 아이와 둘이서는 들어가기가 어렵다. 매운 것이 많아 아이가 먹을 수 없고 둘이 들어가 하나만 시키기도 마땅치 않다. 무엇보다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가 한 숟가락 뜨고 안 먹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난감해진다.</p>
<p>그래서 우리가 먹는 건 김밥이나 토스트나 국수다.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것들. 아쉬움은 접어두고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쪽을 고른다.</p>
<p>백 년쯤 된 거리에서 우리는 김밥을 먹었다.</p>
<p>이 거리의 오래된 것들은 박물관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냥 서 있고 그냥 영업 중이다.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고 문을 열고 들어가고 한 그릇을 비우고 나온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p>
<p>대단할 것 없는 저녁이었다.</p>
<h3>6. 같은 거리</h3>
<p>저녁을 먹고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궁 담장을 따라 걷다가 시청 앞 광장을 지났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8-wall.jpg" alt="덕수궁 돌담길에 선 아이"></figure><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jeongdong-09-plaza.jpg" alt="서울광장을 걸어가는 아이. 뒤로 옛 시청과 새 시청"></figure><p>광장에는 외국인이 많다. 캐리어를 끌고 지도를 확인하고 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p>
<p>우리 동네에도 외국인이 많다. 오래전부터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살았고 요즘은 여행 온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서울은 어느새 세계가 오는 도시가 되었다.</p>
<p>백이십 년 전에도 이 거리에는 외국인이 많았다. 다만 그들이 여기 온 이유는 지금과 달랐다.</p>
<p>버스에 오르면 아이는 금세 잠이 든다. 나는 그 얼굴을 본다. 조금 전 유리문을 열고 나오며 엄지를 척 들던 얼굴을.</p>
<p>며칠 동안 나를 따라오던 생각의 답이 그 얼굴에 있었다. 내 아이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사소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사소해질 수 있게 된 것. 그게 그들이 원했던 결과였다.</p>
<p>백이십 년 전 이 거리에서 누군가가 끝내 지키지 못한 권리를 내 아이는 그냥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 말을 웃으면서 쓴다. 예스.</p>
<p>누군가는 이 거리를 보려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 나는 아이 학원 때문에 왔다. 같은 거리다.</p>
<p>비행기를 타야만 백 년을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p>
<p>나는 매일 여행한다. 일상을 여행자처럼 산다. 바로 이곳 서울에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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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는 매일 여행한다, 바로 서울에서</title>
      <link>https://www.iamtheseouler.com/ko/story</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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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5 Mar 2025 00:00:00 GMT</pubDate>
      <description><![CDATA[<p>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건, 2025년 3월의 어느 여행 때문이다. 마카오와 홍콩으로 떠난, 나의 첫 해외 홀로 여행.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전한 나를 만났고, 돌아와서는 그 모습을 어떻게 일상에서도 이어갈지 오래 고민했다. 그 고민의 끝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이 이야기다.</p>
<h3>1. 원래 나는 이 여행의 멤버가 아니었다</h3>
<p>시작은 언니의 항공 마일리지였다. 언니가 아빠와 함께 마카오·홍콩 여행을 계획하고 비행기표를 샀다. 목적지가 그곳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가 예전에 다녀온 라스베이거스를 다시 가보고 싶어 하셨는데 — 그곳의 추억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 미국을 다시 가긴 쉽지 않으니, 가까운 마카오를 대신 넣고 홍콩까지 묶은 일정이었다.</p>
<p>원래 나는 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이 &quot;부녀가 함께 가는 여행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quot;며 권했고, 그렇게 나는 뒤늦게 합류했다. 표를 따로 끊은 것도 그래서였다. 이왕 가는 거 더 있다 오라며, 먼저 들어가 며칠 뒤에 나오는 일정이 됐다.</p>
<p>그 무렵 언니는 책 쓰는 일로 무척 바빴다. 그래서 동선을 짜고, 맛집을 찾고, 일정을 정리하는 일은 주로 내가 서칭하게 되었다. 그땐 몰랐다. 이게 나중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p>
<p>드디어 준비가 끝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싸던 밤.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고. 식사 중에 누군가 머리 위로 뜨거운 국을 옮기다 언니 얼굴에 쏟았고, 이마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병원에서는 여행이 어렵겠다고 했다. 여행 하루 전날, 여행이 취소되는 상황이었다.</p>
<p>걱정되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언니를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고, 언니가 주도한 여행에서 정작 주선자가 빠진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아빠와 단둘이라는 것도 어색했다. 아빠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p>
<p>아빠와의 관계는 편하지만은 않았다. 부녀지간이지만 아빠는 무뚝뚝하셨고, 그런 아빠를 닮아 나도 그랬다. 어색한 사이랄까. 게다가 아빠는 청력이 좋지 않으신데 나는 목소리가 작은 편이라, 대화에도 불편함이 있었다.</p>
<p>이런 걱정을 안고, 나의 첫 홀로 여행이 시작되었다.</p>
<h3>2. 혼자, 낯선 도시에 내리다</h3>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1-departure.jpg" alt="인천공항 게이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비행기"></figure><p>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을 떠났다. 남편과 아들, 딸을 두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어색했고,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따라붙었다.</p>
<p>마카오에 도착하자마자 실감했다. 이제 기댈 사람이 없다는 걸.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해외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일은 늘 남편의 몫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안 되는 영어로 직접 길을 물어야 했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무료 셔틀을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복잡한 경로였고, 나는 더듬거리며 겨우겨우 그 길을 뚫었다.</p>
<p>셔틀에서 내려 구글 지도를 켰다. 그런데 지도가 자꾸 어긋났다. 분명 이쪽이라는데 아무리 걸어도 나오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좁은 골목을, 사람들을 헤치며, 맞지 않는 지도를 들고 헤맸다. 결국 지나가던 현지 경찰처럼 보이는 분께 물었더니 — 숙소는 바로 옆에 있었다. 지도는 한 블록을 더 가라고 했는데.</p>
<p>그렇게, 온전히 내 힘으로 첫 체크인을 마쳤다.</p>
<h3>3. 답사 — 서브에서 메인으로</h3>
<p>호텔에 도착하니 피곤했지만, 짐만 내려놓고 바로 다시 나갔다. 아빠가 오면 안내를 해야 했으니까. 그 전에 한 번은 직접 걸어봐야 했다.</p>
<p>아빠는 허리 디스크로 허리와 다리 통증이 있어 오래 걷지 못하신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편한 동선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식당과 주요 관광지의 위치도 미리 파악해둬야 했다. 나는 구글 지도를 들고, 아빠와 걷게 될 길을 하나하나 먼저 답사했다.</p>
<p>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답사를 다니는 내내, 나는 묘한 흥분과 희열을 느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제대로 찾아냈을 때의 작은 쾌감. 좁은 골목을 구석구석 발로 밟으며 눈으로, 오감으로 빨아들이는 낯선 자극들. 도시의 온갖 것들이 잠들어 있던 세포를 하나씩 깨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나는 은근히 길을 잘 찾고,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2-alley.jpg" alt="마카오의 밤 골목, 계단 끝에 불 밝힌 성 바울 성당 유적"></figure><p>그렇게 도시를 익혀둔 뒤, 밤늦게 도착한 아빠를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가기 전엔 걱정이 앞섰다. 단둘이 어색하면 어쩌지. 그런데 막상 낯선 도시에서 아빠를 만나는 순간, 걱정은 사라지고 대신 설렘이 밀려왔다.</p>
<p>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내일의 일정에 대해 가이드처럼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느새 어색함은 반가움으로, 그리고 여행 파트너 사이의 친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늘 딸로서 받기만 하던 관계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빠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보람이, 심야버스의 창밖 불빛과 함께 조용히 번졌다.</p>
<p>그렇게 첫날이 저물었다.</p>
<h3>4. 마카오 — 화려함을 입다</h3>
<p>다음 날 아침, 본격적으로 관광에 나섰다. 전날 미리 돌아둔 덕분에 마음이 편했다. 답사가 준 자신감으로, 나는 아빠를 데리고 자신 있게 거리를 누볐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3-street.jpg" alt="마카오 구시가지 모자이크 보도를 앞서 걸어가는 아빠"></figure><p>마카오는 마음에 쏙 들었다. 오랜 식민의 역사가 빚은 풍경과, 카지노의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도시. 그 명암마저 나에겐 온통 좋은 자극이었다. 다행히 아빠도 이 도시를 충분히 즐기셨고,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p>
<p>이어 코타이의 리조트로 옮겨 짧은 호캉스도 누렸다.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 잠시 현실을 잊고 그 화려함을 옷처럼 걸쳐본 시간. 그렇게 우리의 2박 3일도 반짝이며 저물었다. 함께 오지 못한 가족들과 언젠가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이제 홍콩으로 향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4-cotai.jpg" alt="밤의 코타이, 대로 위로 불 밝힌 파리지앵 타워"></figure><h3>5. 홍콩 — 사랑에 빠지다</h3>
<p>마카오에서 홍콩으로는 버스로 넘어갔다. 두 도시가 긴 다리로 이어져 있어 육로로 갈 수 있었다. 그 길고 신기한 다리를 건너는 동안, 새로운 여행지로 옮겨가는 설렘이 차올랐다. 홍콩의 공기는 확실히 달랐다.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이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5-bridge.jpg" alt="홍콩으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본 칭마대교"></figure><p>한 가지 걱정은 있었다. 마카오는 미리 답사할 시간이 있었지만, 홍콩은 나도 처음이라 아빠와 함께 부딪쳐 나가야 했다. 그래도 이미 자신감이 붙은 나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해보자.</p>
<p>방법은 이랬다. 목적지를 찾기 전에 아빠는 잠시 기다리시게 하고, 내가 먼저 길을 찾은 뒤 다시 돌아와 아빠를 모셔왔다. 다리가 불편한 아빠가 괜히 헤매다 고생하실까 봐, 내가 두 번 오가며 아빠의 체력을 대신했다. 그러다 또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잘 걷고,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참, 자꾸만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여행이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6-tenement.jpg" alt="빨간 택시와 트램 너머, 초록 타일이 덮인 오래된 아파트"></figure><p>홍콩은 마카오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빼곡한 빌딩 숲,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거리. 낡았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힙했다. 세련됨과 빈티지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곳. 자유로웠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자유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빠르게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7-central.jpg" alt="밤의 센트럴, 빌딩 사이를 채운 네온과 전광판"></figure><h3>6. 아빠와의 홍콩 — 마침표를 찍다</h3>
<p>아빠와 나는 두 발로 이 도시를 누볐다.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을 피해 걸었고, 오래된 노포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곳에 쌓인 세월을 맛보았다. 야경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p>
<p>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아빠와 이 세상에서 헤어지는 마지막 날, 나는 이 밤을 떠올리겠구나. &quot;아빠, 그때 우리 홍콩에서 야경 보며 앉아 얘기했던 거 기억나? 나 그때 참 좋았어. 고마워, 나의 아빠여서.&quot; 그렇게 말하게 되겠구나.</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8-peak.jpg" alt="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본 홍콩의 밤,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버"></figure><p>오랜 세월 아빠와의 관계에서 풀리지 않던 감정들이, 그 밤 조용히 매듭을 짓고 마침표를 찍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9-tram.jpg" alt="트램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는 아빠"></figure><p>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야경을 보고 내려오던 길, 마침 지나가는 트램을 보고 즉흥적으로 아빠와 함께 올랐다. 2층 맨 앞자리가 비어 있어 거기 앉았는데, 구불구불 아슬아슬하게 빌딩 숲을 통과하는 그 길이 마치 놀이기구 같았다. 오래된 것을 타고 현재를 누비는 느낌. 과거와 현재가 한 몸으로 흐르는 감각. 훗날 아빠에게 홍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 물었을 때, 아빠도 이 트램을 첫 번째로 꼽으셨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0-tracks.jpg" alt="2층 트램에서 본, 밤의 도시로 휘어 들어가는 선로"></figure><p>그렇게 아빠와의 홍콩은 저물었다. 이제 아빠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p>
<h3>7. 혼자 남은 홍콩 — 살아있음</h3>
<p>아빠를 배웅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오롯이 혼자서 홍콩을 누리고 돌아가면 된다.</p>
<p>내가 택한 방법은 걷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봤던 거리, 여행 프로그램에 나왔던 익숙한 골목들을 걷고 또 걸었다. 걸으면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의 시선을.</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1-mural.jpg" alt="경사진 길의 파란 벽에 그려진 홍콩 옛 아파트 벽화"></figure><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2-escalator.jpg" alt="소호의 오래된 건물 사이를 올라가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figure><p>원래 나는 혼자 식당에서 밥도 잘 못 먹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디저트를 먹고, 혼자라는 두려움을 하나씩 깨며 많은 것을 처음으로 해봤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이곳에 올 날을 그렸다.</p>
<p>여행 마지막 전날.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p>
<p>혼자 맞는 첫 생일. 그날 내가 간 곳은 홍콩 디즈니랜드였다. 혼자서는 절대 가지 않을 법한 곳에, 그것도 생일에 간 것이다. 이유는 역시 답사였다. 언젠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오려면, 내가 먼저 가서 겪어봐야지.</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3-disneyland.jpg" alt="홍콩 디즈니랜드 입구"></figure><p>늘 아이들 손을 잡고 오던 놀이동산에 혼자 오니 조금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딸과는 탈 수 없던 놀이기구도 타고, 누군가를 챙겨야 하는 수고 없이 온전히 나만을 위해 보낸 하루. 그것만으로 훌륭한 생일 선물이었다. 마지막 공연까지 다 보고, 늦은 밤에야 숙소로 돌아왔다.</p>
<p>그런데 마음 한켠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빠의 못다 이룬 마음이었다.</p>
<p>아빠는 귀국 전, 평소 고마워하던 분께 선물을 하고 싶어 하셨다. 여행 내내 눈여겨보던 중국 전통 다기 세트가 있었지만, 가격도 그렇고 이게 맞나 망설이다 결국 사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p>
<p>늦은 밤, 나는 그 다기 세트를 사려고 숙소 근처 매장을 찾아봤다. 원래 봤던 매장은 너무 멀어 다음 날 출국 전엔 갈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숙소 가까운 곳에 매장이 있었다. 그런데 오픈 시간과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정말 빠듯했다. 급하게 사서 곧장 나서야 하는 상황. 그냥 포기할까 싶다가도, 망설이던 아빠의 그 눈빛이 아른거려 — 해보자,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그 매장에도 물건이 있었고, 나는 늦지 않게 공항에 닿을 수 있었다.</p>
<p>한국에 돌아가 그걸 아빠께 건넸을 때, 만족해하시던 그 얼굴. 그걸 보는 나도 마음이 더없이 흐뭇했다.</p>
<h3>8. 서울 — 매일 여행하는 사람</h3>
<p>나는 서울에 있다. 내가 뿌리내려 살고 있는 서울.</p>
<p>여행은 끝이 있고, 일상은 이어진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처음 며칠은 여행의 도파민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의 기분 좋은 텐션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도 유효기간이 있어, 금세 사라져 버렸다.</p>
<p>반복되는 일상의 루틴은 안전감을 주었지만, 마음 한켠에선 우울이 피어올랐다. 여행할 땐 그렇게 생기 넘치던 내가, 왜 일상에선 이토록 처져 있을까. 그 극명한 대비에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여행을 가고 안 가고의 문제일까.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p>
<p>나는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상도 여행처럼 행복하고, 늘 설렐 순 없을까. 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만날 순 없을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지면 어떨까. 뿌리내린 곳에서 누리는 안전감과, 여행자의 설렘. 이 둘이 공존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p>
<p>그러면서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이, 문득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p>
<p>아, 누군가는 이 서울을 여행으로 오겠구나. 누군가의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에 올라 있겠구나.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곳일 텐데, 나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구나.</p>
<p>그럼, 서울을 나의 여행지라고 여기며 살아보자.</p>
<p>나는 매일 여행한다. 일상을 여행자처럼 산다. 바로 이곳, 서울에서.</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건, 2025년 3월의 어느 여행 때문이다. 마카오와 홍콩으로 떠난, 나의 첫 해외 홀로 여행.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전한 나를 만났고, 돌아와서는 그 모습을 어떻게 일상에서도 이어갈지 오래 고민했다. 그 고민의 끝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이 이야기다.</p>
<h3>1. 원래 나는 이 여행의 멤버가 아니었다</h3>
<p>시작은 언니의 항공 마일리지였다. 언니가 아빠와 함께 마카오·홍콩 여행을 계획하고 비행기표를 샀다. 목적지가 그곳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가 예전에 다녀온 라스베이거스를 다시 가보고 싶어 하셨는데 — 그곳의 추억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 미국을 다시 가긴 쉽지 않으니, 가까운 마카오를 대신 넣고 홍콩까지 묶은 일정이었다.</p>
<p>원래 나는 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이 &quot;부녀가 함께 가는 여행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quot;며 권했고, 그렇게 나는 뒤늦게 합류했다. 표를 따로 끊은 것도 그래서였다. 이왕 가는 거 더 있다 오라며, 먼저 들어가 며칠 뒤에 나오는 일정이 됐다.</p>
<p>그 무렵 언니는 책 쓰는 일로 무척 바빴다. 그래서 동선을 짜고, 맛집을 찾고, 일정을 정리하는 일은 주로 내가 서칭하게 되었다. 그땐 몰랐다. 이게 나중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p>
<p>드디어 준비가 끝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싸던 밤.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고. 식사 중에 누군가 머리 위로 뜨거운 국을 옮기다 언니 얼굴에 쏟았고, 이마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병원에서는 여행이 어렵겠다고 했다. 여행 하루 전날, 여행이 취소되는 상황이었다.</p>
<p>걱정되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언니를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고, 언니가 주도한 여행에서 정작 주선자가 빠진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아빠와 단둘이라는 것도 어색했다. 아빠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p>
<p>아빠와의 관계는 편하지만은 않았다. 부녀지간이지만 아빠는 무뚝뚝하셨고, 그런 아빠를 닮아 나도 그랬다. 어색한 사이랄까. 게다가 아빠는 청력이 좋지 않으신데 나는 목소리가 작은 편이라, 대화에도 불편함이 있었다.</p>
<p>이런 걱정을 안고, 나의 첫 홀로 여행이 시작되었다.</p>
<h3>2. 혼자, 낯선 도시에 내리다</h3>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1-departure.jpg" alt="인천공항 게이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비행기"></figure><p>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을 떠났다. 남편과 아들, 딸을 두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어색했고,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따라붙었다.</p>
<p>마카오에 도착하자마자 실감했다. 이제 기댈 사람이 없다는 걸.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해외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일은 늘 남편의 몫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안 되는 영어로 직접 길을 물어야 했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무료 셔틀을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복잡한 경로였고, 나는 더듬거리며 겨우겨우 그 길을 뚫었다.</p>
<p>셔틀에서 내려 구글 지도를 켰다. 그런데 지도가 자꾸 어긋났다. 분명 이쪽이라는데 아무리 걸어도 나오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좁은 골목을, 사람들을 헤치며, 맞지 않는 지도를 들고 헤맸다. 결국 지나가던 현지 경찰처럼 보이는 분께 물었더니 — 숙소는 바로 옆에 있었다. 지도는 한 블록을 더 가라고 했는데.</p>
<p>그렇게, 온전히 내 힘으로 첫 체크인을 마쳤다.</p>
<h3>3. 답사 — 서브에서 메인으로</h3>
<p>호텔에 도착하니 피곤했지만, 짐만 내려놓고 바로 다시 나갔다. 아빠가 오면 안내를 해야 했으니까. 그 전에 한 번은 직접 걸어봐야 했다.</p>
<p>아빠는 허리 디스크로 허리와 다리 통증이 있어 오래 걷지 못하신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편한 동선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식당과 주요 관광지의 위치도 미리 파악해둬야 했다. 나는 구글 지도를 들고, 아빠와 걷게 될 길을 하나하나 먼저 답사했다.</p>
<p>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답사를 다니는 내내, 나는 묘한 흥분과 희열을 느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제대로 찾아냈을 때의 작은 쾌감. 좁은 골목을 구석구석 발로 밟으며 눈으로, 오감으로 빨아들이는 낯선 자극들. 도시의 온갖 것들이 잠들어 있던 세포를 하나씩 깨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나는 은근히 길을 잘 찾고,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2-alley.jpg" alt="마카오의 밤 골목, 계단 끝에 불 밝힌 성 바울 성당 유적"></figure><p>그렇게 도시를 익혀둔 뒤, 밤늦게 도착한 아빠를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가기 전엔 걱정이 앞섰다. 단둘이 어색하면 어쩌지. 그런데 막상 낯선 도시에서 아빠를 만나는 순간, 걱정은 사라지고 대신 설렘이 밀려왔다.</p>
<p>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내일의 일정에 대해 가이드처럼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느새 어색함은 반가움으로, 그리고 여행 파트너 사이의 친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늘 딸로서 받기만 하던 관계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빠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보람이, 심야버스의 창밖 불빛과 함께 조용히 번졌다.</p>
<p>그렇게 첫날이 저물었다.</p>
<h3>4. 마카오 — 화려함을 입다</h3>
<p>다음 날 아침, 본격적으로 관광에 나섰다. 전날 미리 돌아둔 덕분에 마음이 편했다. 답사가 준 자신감으로, 나는 아빠를 데리고 자신 있게 거리를 누볐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3-street.jpg" alt="마카오 구시가지 모자이크 보도를 앞서 걸어가는 아빠"></figure><p>마카오는 마음에 쏙 들었다. 오랜 식민의 역사가 빚은 풍경과, 카지노의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도시. 그 명암마저 나에겐 온통 좋은 자극이었다. 다행히 아빠도 이 도시를 충분히 즐기셨고,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p>
<p>이어 코타이의 리조트로 옮겨 짧은 호캉스도 누렸다.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 잠시 현실을 잊고 그 화려함을 옷처럼 걸쳐본 시간. 그렇게 우리의 2박 3일도 반짝이며 저물었다. 함께 오지 못한 가족들과 언젠가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이제 홍콩으로 향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4-cotai.jpg" alt="밤의 코타이, 대로 위로 불 밝힌 파리지앵 타워"></figure><h3>5. 홍콩 — 사랑에 빠지다</h3>
<p>마카오에서 홍콩으로는 버스로 넘어갔다. 두 도시가 긴 다리로 이어져 있어 육로로 갈 수 있었다. 그 길고 신기한 다리를 건너는 동안, 새로운 여행지로 옮겨가는 설렘이 차올랐다. 홍콩의 공기는 확실히 달랐다.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이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5-bridge.jpg" alt="홍콩으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본 칭마대교"></figure><p>한 가지 걱정은 있었다. 마카오는 미리 답사할 시간이 있었지만, 홍콩은 나도 처음이라 아빠와 함께 부딪쳐 나가야 했다. 그래도 이미 자신감이 붙은 나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해보자.</p>
<p>방법은 이랬다. 목적지를 찾기 전에 아빠는 잠시 기다리시게 하고, 내가 먼저 길을 찾은 뒤 다시 돌아와 아빠를 모셔왔다. 다리가 불편한 아빠가 괜히 헤매다 고생하실까 봐, 내가 두 번 오가며 아빠의 체력을 대신했다. 그러다 또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잘 걷고,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참, 자꾸만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여행이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6-tenement.jpg" alt="빨간 택시와 트램 너머, 초록 타일이 덮인 오래된 아파트"></figure><p>홍콩은 마카오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빼곡한 빌딩 숲,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거리. 낡았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힙했다. 세련됨과 빈티지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곳. 자유로웠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자유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빠르게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7-central.jpg" alt="밤의 센트럴, 빌딩 사이를 채운 네온과 전광판"></figure><h3>6. 아빠와의 홍콩 — 마침표를 찍다</h3>
<p>아빠와 나는 두 발로 이 도시를 누볐다.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을 피해 걸었고, 오래된 노포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곳에 쌓인 세월을 맛보았다. 야경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p>
<p>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아빠와 이 세상에서 헤어지는 마지막 날, 나는 이 밤을 떠올리겠구나. &quot;아빠, 그때 우리 홍콩에서 야경 보며 앉아 얘기했던 거 기억나? 나 그때 참 좋았어. 고마워, 나의 아빠여서.&quot; 그렇게 말하게 되겠구나.</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8-peak.jpg" alt="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본 홍콩의 밤,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버"></figure><p>오랜 세월 아빠와의 관계에서 풀리지 않던 감정들이, 그 밤 조용히 매듭을 짓고 마침표를 찍었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09-tram.jpg" alt="트램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는 아빠"></figure><p>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야경을 보고 내려오던 길, 마침 지나가는 트램을 보고 즉흥적으로 아빠와 함께 올랐다. 2층 맨 앞자리가 비어 있어 거기 앉았는데, 구불구불 아슬아슬하게 빌딩 숲을 통과하는 그 길이 마치 놀이기구 같았다. 오래된 것을 타고 현재를 누비는 느낌. 과거와 현재가 한 몸으로 흐르는 감각. 훗날 아빠에게 홍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 물었을 때, 아빠도 이 트램을 첫 번째로 꼽으셨다.</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0-tracks.jpg" alt="2층 트램에서 본, 밤의 도시로 휘어 들어가는 선로"></figure><p>그렇게 아빠와의 홍콩은 저물었다. 이제 아빠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p>
<h3>7. 혼자 남은 홍콩 — 살아있음</h3>
<p>아빠를 배웅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오롯이 혼자서 홍콩을 누리고 돌아가면 된다.</p>
<p>내가 택한 방법은 걷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봤던 거리, 여행 프로그램에 나왔던 익숙한 골목들을 걷고 또 걸었다. 걸으면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의 시선을.</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1-mural.jpg" alt="경사진 길의 파란 벽에 그려진 홍콩 옛 아파트 벽화"></figure><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2-escalator.jpg" alt="소호의 오래된 건물 사이를 올라가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figure><p>원래 나는 혼자 식당에서 밥도 잘 못 먹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디저트를 먹고, 혼자라는 두려움을 하나씩 깨며 많은 것을 처음으로 해봤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이곳에 올 날을 그렸다.</p>
<p>여행 마지막 전날.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p>
<p>혼자 맞는 첫 생일. 그날 내가 간 곳은 홍콩 디즈니랜드였다. 혼자서는 절대 가지 않을 법한 곳에, 그것도 생일에 간 것이다. 이유는 역시 답사였다. 언젠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오려면, 내가 먼저 가서 겪어봐야지.</p>
<figure><img src="https://www.iamtheseouler.com/photos/origin-13-disneyland.jpg" alt="홍콩 디즈니랜드 입구"></figure><p>늘 아이들 손을 잡고 오던 놀이동산에 혼자 오니 조금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딸과는 탈 수 없던 놀이기구도 타고, 누군가를 챙겨야 하는 수고 없이 온전히 나만을 위해 보낸 하루. 그것만으로 훌륭한 생일 선물이었다. 마지막 공연까지 다 보고, 늦은 밤에야 숙소로 돌아왔다.</p>
<p>그런데 마음 한켠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빠의 못다 이룬 마음이었다.</p>
<p>아빠는 귀국 전, 평소 고마워하던 분께 선물을 하고 싶어 하셨다. 여행 내내 눈여겨보던 중국 전통 다기 세트가 있었지만, 가격도 그렇고 이게 맞나 망설이다 결국 사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p>
<p>늦은 밤, 나는 그 다기 세트를 사려고 숙소 근처 매장을 찾아봤다. 원래 봤던 매장은 너무 멀어 다음 날 출국 전엔 갈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숙소 가까운 곳에 매장이 있었다. 그런데 오픈 시간과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정말 빠듯했다. 급하게 사서 곧장 나서야 하는 상황. 그냥 포기할까 싶다가도, 망설이던 아빠의 그 눈빛이 아른거려 — 해보자,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그 매장에도 물건이 있었고, 나는 늦지 않게 공항에 닿을 수 있었다.</p>
<p>한국에 돌아가 그걸 아빠께 건넸을 때, 만족해하시던 그 얼굴. 그걸 보는 나도 마음이 더없이 흐뭇했다.</p>
<h3>8. 서울 — 매일 여행하는 사람</h3>
<p>나는 서울에 있다. 내가 뿌리내려 살고 있는 서울.</p>
<p>여행은 끝이 있고, 일상은 이어진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처음 며칠은 여행의 도파민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의 기분 좋은 텐션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도 유효기간이 있어, 금세 사라져 버렸다.</p>
<p>반복되는 일상의 루틴은 안전감을 주었지만, 마음 한켠에선 우울이 피어올랐다. 여행할 땐 그렇게 생기 넘치던 내가, 왜 일상에선 이토록 처져 있을까. 그 극명한 대비에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여행을 가고 안 가고의 문제일까.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p>
<p>나는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상도 여행처럼 행복하고, 늘 설렐 순 없을까. 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만날 순 없을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지면 어떨까. 뿌리내린 곳에서 누리는 안전감과, 여행자의 설렘. 이 둘이 공존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p>
<p>그러면서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이, 문득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p>
<p>아, 누군가는 이 서울을 여행으로 오겠구나. 누군가의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에 올라 있겠구나.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곳일 텐데, 나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구나.</p>
<p>그럼, 서울을 나의 여행지라고 여기며 살아보자.</p>
<p>나는 매일 여행한다. 일상을 여행자처럼 산다. 바로 이곳, 서울에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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